▲상대방을 압박하는 포스 ㅎㄷㄷ
이름 : 데니스 로드맨 (Dennis Keith Rodman)
별명 : 코트의 난폭자, 코트의 악동
포지션 : 포워드(forward)(다들 파워포워드라고하죠.)
키 :203cm정도 (6피트8인치정도)
몸무게 : 95kg정도 (209파운드정도)
학교 : SE OKLA ST
드래프트 : 27th Overall IN 1986
▲박력있는 저 허슬플레이...나도 해보고 싶다...
제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고 본받고싶고 따라잡고 싶은 사람입니다.
데니스 로드맨 !! 제가 농구를 하고 나서 저의 플레이를 만들어준 모티브이신분이죠...
로드맨의 여러 영상을 보고 슬램덩크도 보고 ... 제를 농구의 길로 빠저들게한 원인이죠...
저도 농구를 중3중반쯤에 시작을 하고 키고 큰편이 아니라서 잘하기 힘들다... 라고 생각을 했지만 ..
로드맨은.. 로드맨은 최고로 손꼽을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고등학교시절 까지 농구를 하지않고 여러가지 방황을 했다죠.. 불후한 가정형편 때문에.. 그래서 저도 포기를 못하는것이 아닐까....?
밑에는 데니스로드맨의 일대기를 잘설명해주시길래 펌을 하였습니다..^^ 이해해주시길
프로 선수가 되기까지
61년 생인 로드맨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농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텍사스에 위치한 쿡 카운티 2년제 대학에 진학했지만, 농구선수로의 진로를 결정한 후 사우스 이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학(NAIA)으로 편입했다. 그가 농구선수를 목표로 삼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갑자기 8인치씩이나 커진 키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첫 경기에서 19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자신을 알렸고, 대학 시절 3년 간 평균 25.7득점에 15.7리바운드, 야투 성공률 63.7%를 기록하는 등 매년 NAIA 올 아메리카 선수에도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공항 청소부로 일하는 등 불우한 청년시절을 보내며 늦게 농구를 하기 시작한 그의 성공신화를 예측하는 이는 드물었다. 결국 86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27번째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지명되며 평범한 프로 선수로서의 시작을 보였다.
▶ 평범한 데뷔. 그리고 성장
데뷔 첫 해인 86-87시즌에는 평균 15분 출장에 4.3리바운드를 잡는 데 그쳤다. 하지만 공격 리바운드와 수비 리바운드의 비율이 1:1 이라는 점은 장차 최고의 리바운더가 될 그의 재능을 암시하는 듯 했다. 이듬해 82게임 전 경기를 소화해 내며 경기 당 26.2분 출장으로 평균 11.6득점, 8.7리바운드라는 성장을 보였다. 이런 그의 성장에는 필 잭슨과 함께 훗날 자신의 농구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던 척 데일리 감독이 있었다. 시즌 중반이후 척 데일리는 에드리안 덴폴리 대신 벤치 멤버였던 로드맨을 기용. 그의 성장을 가속화 시켰다.
88-89시즌, 이때부터 로드맨은 소속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Badboys' 란 팀컬러에 완벽하게 적응하기 시작한다. 플레이 스타일은 그 전보다 훨씬 과격해졌으며 허슬 플레이도 자주 선보였다. 경기 당 리바운드는 어느 덧 9.4 개에 이르렀고, 야투 성공률도 리그 최고인 59.5%를 기록했다. 당시 강호였던 보스턴 셀틱스,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져스 등을 상대로 속공 찬스에서 투핸드 덩크슛을 작렬시키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하던 모습도 연출하곤 했다. 89년 2월 18일에는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를 상대로 32득점 2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가끔씩 그의 숨은 공격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 해 탄탄한 조직력과 수비력이 절정에 달한 디트로이트는 매직 존슨의 마술 패싱이 빛을 발한 LA 레이커스를 4-0으로 스윕하며 챔피언에 등극했다. 플레이 오프에서 평균 10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낸 로드맨은 처음으로 올 NBA디펜시브 퍼스트팀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고, 다음해 주전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89-90시즌 디트로이트는 2년 연속 우승에 도전했다. 시즌 중반부터 주전자리를 못 박은 로드맨은 팀의 막판 39승 4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그의 커리어 중 가장 빛나는 ‘올해의 최우수 수비 선수 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조 듀마스, 아이재아 토마스, 빌 레임비어 등과 함께 디트로이트를 2년 연속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으며 팀 역사상 최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당시 최고의 득점 기계였던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도 막강 수비의 디트로이트에겐 적수가 되지 못했다.
▶ ‘노력파’ 최고의 리바운더가 되다
90년대 들어 로드맨은 매일 저녁 숙소에서 경기가 녹화된 비디오 테입을 보고 공이 튕겨져 나가는 위치의 분포와 인사이더들의 움직임을 일일이 체크하며 파워포워드로서 203cm의 다소 불리한 신체적 조건을 극복하는데 열을 올렸다. 90-91시즌에는 공격 리바운드(평균 4.4개. 총 361개)부문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고, 전체 리바운드 12.5개로 데이비드 로빈슨에 이어 2위에 올랐다. 그는 상대편 선수에게 가장 골치 아픈 선수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인사이드에서의 탁월한 수비력 덕분에 2년 연속 ‘올해의 최우수 수비 선수상’을 수상했다.
다 음해인 92년 로드맨은 평균 18.7개의 엄청난 리바운드 스탯을 기록하며 월트 챔벌레인의 71-72시즌(19.2개)이후 가장 좋은 리바운드 스탯을 찍었다. 시즌 중에는 커리어 최고인 34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한 경기도 있었고 정규시즌 절반에 가까운 39경기에서 20개 이상을 잡아냈다. 85-86시즌 백인 최초로 리바운드 왕(13.1개)에 올랐던 빌 레임비어의 뒤를 이어 당대 최고의 리바운더로 자리 매김 하는 순간이었다. 89-90시즌에 이어 두 번째로 올스타에 선정된 그는 36분 동안 코트를 누비며 17리바운드를 기록하기도 했다. 시카고 불스가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려한 92-93시즌 2년 연속 경기 당 18개 이상의 리바운드(18.3개)를 잡아내며 ‘리바운드 천재’라는 칭호를 얻는다.
현대 농구 사에서는 누구도 근접하기 힘들었던 평균18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2년 연속 잡아낸 로드맨. 그의 주가는 최고조에 달했다. 또 그는 현재 팬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달리 농구에서만큼은 매우 성실했던 선수였다. 약 6년 가까이를 연속 출장하며 470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개인기록도 세웠었다. 경기 당 평균 약 39분을 뛰며 농구에 전념한 그에게 원조 드림팀 감독으로 유명한 디트로이트의 척 데일 리가 팀을 떠나면서 그의 농구 인생에도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때는 모델이었던 첫 아내 애니와 결혼한 후 8개월만에 이혼한 시기였기도 했다. 인생에서의 시련을 겪은 로드맨이 이때부터 방황하고 비뚤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93년 10월 1일, 데니스 로드맨과 아이재아 모리스는 션 엘리엇과 데이비드 우드를 택한 디트로이트에 의해 방출되어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영입되었다. 매너 좋기로 소문난 ‘코트의 신사’ 데이비드 로빈슨과 비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말썽꾸러기’ 데니스 로드맨을 좁은 인사이드에 같이 있게 하는 것이 애초부터 억지였을까? 둘은 곧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비록 로빈슨은 평균 29.8득점으로 득점 왕을 거머쥐었고, 로드맨도 경기 당 17개의 리바운드로 리바운드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시즌 내내 둘의 마찰은 계속되었다. 로드맨은 로빈슨의 리더 자질에 불만을 표현했으며, 그의 불만족스러움은 머리 색깔로 나타났다. 금발, 빨강, 보라, 파랑 등 형형색색의 염색으로 머리를 치장했고 그에 따른 승패도 달리 나타났다.
94년 1월 22일 댈러스 매버릭스 전에서 시즌 NBA 최고 기록이자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인 32개의 리바운드를 걷어내며 스퍼스를 막강 수비 팀의 대열에 올려놓았고 팀은 그 해 ‘전통의 수비 팀’ 뉴욕 닉스에 이어 최소실점 부문 2위를 기록했다. 그는 샌안토니오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94-95시즌 정규시즌 32경기를 결장하게 된다. 특히 3월 오토바이 사고로 어깨가 골절되어 14경기에 결장했는데 이후 복귀하여 평균 16.8개의 리바운드로 4년 연속 리바운드 제왕에 올랐다. 샌안토니오는 정규시즌 62승 20패로 MVP 데이비드 로빈슨까지 배출했으나 하킴 올라주원의 휴스턴 로케츠에게 덜미를 잡히며 우승의 꿈을 접는다.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하킴 올라주원은 자신의 주특기인 피 벗 플레이와 훼이크로 로빈슨을 압도했고, 센터 싸움에서 소극적이었던 로빈슨은 시리즈에서 패한 후 세간의 비난을 들어야 했다. 올라주원은 정규시즌의 팀 성적을 플레이오프에서 만회하며 휴스턴의 2년 연속 우승을 이끄는데 일등 공신이 됐다.
▶ 불스 왕조의 영원한 91번으로 기억되다
마침내 95년 10월 2일, 샌안토니오의 로드맨은 시카고의 월 퍼듀와 트레이드 되었다. 플레이오프에서 신발을 벗어 던지는 등 그의 비행을 참지 못한 샌안토니오의 단호한 결정이었다. 이로써 시카고 불스의 91번 유니폼(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긴급구조 911을 요청하라 는 의미)을 입게 된 로드맨은 디트로이트에 이어 또 다른 왕조 건설의 주역이 된다. 명장 필 잭슨 감독의 트라이앵글 오펜스 작전으로 그는 그의 임무가 리바운드와 수비, 그리고 허슬 플레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데뷔 10년 차였던 로드맨은 그간 경험을 통해 팀이 승리하는데 충실했고, 시카고가 72승 10패라는 역대 최고 승률을 내는 데 기촉제 역할을 했다. 평균 리바운드 14.9개로 이전보다 기록은 떨어졌지만 최고의 리바운더라는 칭호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해 시애틀 슈퍼 소닉스와의 결승 6차전에서는 시카고가 우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속공 찬스에서 스카티 피펜의 패스를 받아 리버스 레이업을 성공시키며 추가 자유투까지 넣었던 로드맨. 숀 캠프를 상대로 오펜스 파울을 유도해 경기 흐름을 바꾸었던 모습, 마이클 조던에게 결정적인 패스를 성공시키며 3쿼터를 자신의 쿼터로 만들어 버린 모습 등은 90년대의 로드맨을 그리워하는 현 팬들에게 종종 회자되고 있다. 시애틀과의 결승전 시리즈 2차 전과 6차 전에서 각각 공격리바운드 11개를 기록해 이전 엘빈 헤이즈가 세운 NBA기록과 두 번이나 타이를 이루기도 했다. 또 97년 1월 14일 워싱턴 불리츠 전에서는 대망의 10000리바운드를 달성했다. 이 후 97년 유타와의 결승전에서는 칼 말론, 그렉 오스터 텍, 포스터 등 3명의 장신 인사이더에 고전하며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있어야 했던 설움도 있었지만 결국 생애 4번째 우승을 맛보는 쾌거를 이룬다. 97-98시즌 피펜의 부상으로 시카고가 흔들렸던 당시 로드맨은 마이클 조던을 도와 시카고를 이끌었고, 시즌 초반 원정경기에서 전패를 당하다시피 하여 8승 7패로 시작했던 팀을 21승 9패로 중부지구 상위랭크에 올려놓았다. 시즌 중반 애틀란타 호크스, 댈러스 매버릭스와의 홈 경기에서 각각 25, 2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자신이 최고의 리바운더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98년 유타와의 결승 4차전, 접전을 거듭하던 종료 직전 회심의 자유투를 성공시키며 두 손을 번쩍 들었던 로드맨의 제스쳐는 그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장면이었다. 생애 5번째 우승을 차지한 후 그는 은퇴와 복귀를 번복했다.
그리고 99년 2월 23일 자유계약선수로 LA레이커스와 계약하며 레이커스의 10연승을 주도했지만, 잇단 비행과 잠적으로 구단 관계자들을 애타게 했고 웨이브 공시로 같은 해 4월 15일 방출되었다. 비록 한 차례였지만, 마이클 조던이 은색 안경을 쓰고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진 휴스턴 피펜과 LA 로드맨의 매치장면은 팬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2000년 2월 3일 댈러스 매버릭스는 로드맨을 영입했지만, 그들의 인연은 채 한 달 남짓이었고, 다시 로드맨은 팀에서 방출되었다. 댈러스의 70번 유니폼, 그것이 바로 로드맨이 NBA에서 입었던 마지막 유니폼이 된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jnml?Redirect |작성자 짱후니
▲가까이 오지마 리바운드.... 아무도 근처에 못가..ㅎ
『 나의 리바운드란 아무런 의미 없이 높이에 의지해 한 번높이 뛰어오르기 보다 나의 심장과 열정의 크기로 여러번 자주 뛰어 오르는거다. 나는 NBA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든 리바운드를 잡아내야 한다고 내 마음을 단련시켜 왔다. 만일 그 볼을 잡아내지 못하면 나는 댈러스로 , 그 거리로, 그 지옥으로 돌아가게 될거라고 생각했다. - 데니스 로드맨(리바운드에 대해서) 』